일본인의 四季
일본인의 四季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들은 각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일본인의 눈에서 한국은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긴 나라고 한국인의 시선에서 일본인 여름을 견딜 수 없는 나라지만, 제각각 그 안에서의 사계절은 뚜렷하고 이를 자랑거리로 삼아왔다. 그 와중에서도 일본인의 계절사랑은 남다르다. 사계절에 대한 자부심, 찾아왔다가는 어느새 훌쩍 떠나버리고, 다시 찾아온다는 순환의 속성, 그리고 유난히 연례 행사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특성이 어울려서 일상 생활에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에도 계절감은 깊에 스며들어 있다.
1. 와카에서 보이는 四季
일본인이 사계절을 즐기고 표현하기 좋아한 것은 최근만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이런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미의식 중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는 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물로 벚꽃을 든다. 만개했던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찰나의 화려함과 함께 마음속 어딘가에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예로 헤이안시대에 발달했던 장르인 와카에서는 사랑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가 다름아닌 계절이다.(75p)
袖ひちてむすひし水のこほれるを春立つけふの風やとくらん
소매가 젖는 것도 싫지 않을 정도로 손으로 떠올리는 맑은 물을 이제 들어선 봄바람이 녹이리라
(紀貫之)
春の夜の闇はあやなし梅の花色こそ見えね香やは隠るる
봄밤 어둠은 무엇을 감추려 하나 매화꽃 빛깔이 안 보일지언정 향마저는 숨기지 못하는 것을
(凡河内躬恒)
おきもせずねもせでよるをあかしては春の物とてながめくらしつ
깬 것도 아닌 잔 것도 아닌 채로 밤 지새우곤 하루 종일 봄비를 바라보며 지냈네
(在原業平朝臣)
とどむべきものをはなしにはかなくもちる花ごとにたぐふこころか
가지에 남겨놓을 수 있는 꽃은 아닌데, 아무 보람도 없이, 지는 꽃잎 하나하나에 다가가고 싶은 내 마음이여
(凡河内躬恒)
위의 노래들은 ‘고킨와카슈’에 실린 와카들 중 계절감을 살린 작품들이다. ‘봄바람’ ‘봄밤’ ‘매화’ ‘꽃잎’ ‘봄비’와 같이 봄이라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단어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하이쿠’라는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57577의 와카 중에서 575의 혹쿠만을 노래하는 하이쿠에는 계절감을 뜻하는 단어(季語)가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28312&cid=266&categoryId=1074) 이 계절어가 발달하고 하나의 형식이자 내용의 클리셰로 자리잡은 것은 계절을 노래하는 것을 사랑한 과거 일본인들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만화에서 보이는 四季
계절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전통은 현재의 일본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 미도리카와 유키의 작품 ‘반딧불이의 숲으로’는 봄, 여름, 겨울, 가을의 네 계절을 그린 단편이 모여있는 책이다. 봄에서는 떨어지는 벚꽃잎 아래에서 기타를 치는 장면, 여름에서는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열리는 축제에서 등이 빛나는 장면, 가을에서는 단풍잎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장면, 겨울에서는 앙상한 나무 옆에 스산한 분위기만 스쳐지나가는 장면 등에서 계절감을 느낄 수 있다. 내용 뿐만이 아니라 계절 자체를 관찰하고 시각적으로도 표현한 것을 엿볼 수 있다. 봄을 배경으로 했을 때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따스한 봄의 햇살을 받듯 전체적으로 따듯하면서 희미하게 표현한다. 여름은 강렬한 태양과 그 태양때문에 만들어지는 그림자의 대비가 돋보인다. 작품 전반에 걸쳐 흑백이면서도 여름의 쨍한 햇빛을 표현해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무도 다른 계절에 비해 한결 진한 색을 띈다. 가을은 다양한 색을 가진 계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단풍잎들은 온갖 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대비된다기 보다는 적당한 범위 안에있어서 하나로 조화되어 어우러진다. 겨울에서는 다른 계절에 비해 여백이 넓고 전체적으로 색이 엷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 후기에서도 의식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3. 광고에서 보이는 四季
일본의 주류회사 ‘산토리’의 제품 중 ‘긴무기(金麦)’의 광고는 배우 단 레이檀れい가 계속 출연하여 인기를 끌고 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계절에 어울리는 요소들을 넣는다. 봄의 경우에는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이나 산뜻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여름에는 시원함, 여름밤, 축제와 같은 이미지가 나온다. 가을에는 맛있는 것을 집에서 먹는 분위기를 주로 연출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음식과 맥주, 그리고 해를 보내고 신년을 맞는 주제가 많다.
春はみんなに、平等にやってくるでしょう?
だから好き。
だから春に眼杯しよう。
봄은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오잖아요?
그러니까 좋아요.
그러니까 봄에 건배해요.
(하루킨!편「ハルキン!」篇)
カツオ入りました
気合も入りました
そろそろ夏に入ります
가츠오 들어왔습니다.
기합도 들어갔습니다.
슬슬 여름에 들어갑니다.
(가츠오 들어갑니다-편「カツオはいりまーす」篇)
二人の秋は
きのこたっぷりの
ホイル焼きで始まるのね。
美味しいよ。
こいつは一年中美味しい。
うちの金麦
둘의 가을은
버섯이 가득 들어간
호일구이와 함께 시작하는거지.
맛있어.
얘는 일년 내내 맛있지만.
우리 집의 긴무기.
「うちのキノコちゃん」篇
今年も元気いっぱい働いてくれて
あたしの料理たくさん食べてくれて
うーんと笑ってくれて
ありがとう
올해도 열심히 일해주어서
내 요리를 많이 먹어주어서
기쁘게 웃어주여서
고마워
(‘고마워’의 밤편「アリガトの夜」篇)
http://www.suntory.co.jp/enjoy/movie/index.html?fromid=backtop
내용 뿐만 아니라 화면이나 음향 효과에서도 계절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예를들어 여름이라면 얼음, 찬 물, 파란 하늘, 유카타, 풍경, 바람, 밀짚모자, 축제, 불꽃놀이와 같은 물건이나 이벤트들을 연속적으로 등장시키고 배경으로는 축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전통악기 소리나 풍경소리, 폭죽 소리와 함께 매미소리 등이 들리게 된다. 사계절 내내 시기에 맞춘 광고를 내보냄으로서 지금 이 상품을 소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것이다.
4. 일본인의 四季
계절의 흐름이야 어느 나라에서든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인이 각 계절을 즐기고 보내는 방식은 조금 유별난데가 있다. ‘지금이 아니면 즐길 수 없다’라는 마음(그 수많은 계절 한정 상품을 생각해보자)이 불러일으킨 듯한 현상은 매달 매주 무언가의 이벤트에 참가하게 만든다. 그렇게 하나의 계절을 보내고 끝나갈 때 쯤에는 쓸쓸하긴 하지만 다음 계절을 맞는 기쁨과 내년에 이 계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마음으로 집착하던 것에 비해서는 산뜻하게 이별을 고한다. 과거는 흘려보내는 것이고 미래는 준비해야할 것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찾아올やってくる 것. 그렇다면 남는 것은 현재를 최대한 즐기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지금의 계절을 최대한 즐기고 이를 풍류라 여기는 것이 일반화 된데에는 일본인의 사상적 배경또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오는 겐지와 여인들의 사랑에 대해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여기에 유교적인 옳고 그름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아름답다’라고 느끼면 되는 것이고, 슬픈 것은 슬프다고 애절한 것은 애절하다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겐지모노가타리를 모노노아와레의 정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계절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좋다 나쁘다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즐기는 것이 일본인의 방식이고 그렇게 한 계절을 즐긴 후 보내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행동이 일본인 특유의 틀 안에 갖히게 될 경우에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특정 시키에는 무엇을 ‘해야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학생들은 재수도, 휴학도 잘 하지 않고 취직도 몇년에 걸친 것이 아닌 3학년 말부터 4학년에 이르는 1년 이내에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입사한 회사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일한다. 이 틀에 박힌 일본인의 전형과 각 계절에는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인생 과정을 밟지 않은 사람은 낙오자おちこぼれ가 되고 4월에 응당 해야할 꽃놀이花見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뒤에서 수군거린다.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의무감’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그들은 확언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문제점은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지도 준비하지도 않는 관습으로 타국과 마주할 경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과 기타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인 문제들이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이 되지 않은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본다. 전체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서양에 비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는 동아시아에서, 우파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으면서 역사적인 문제에서는 오히려 눈을 돌리는 것이 문제를 계속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는 일본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듯 (일본의 한 교수님은 내게 ‘지금 일본의 젊은이는 자신들의 조국이 미국과 싸웠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거다’라고 말하셨다.) 일본인들은 과거를 다시 되새김질하는 다른 나라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이해는 우리가 먼저 하려고 해야하는 것일까 일본인이 먼저 하려고 해야하는 것일까. 더 아쉬운 사람이 해야하는 것인지 어떤 사람이 먼저 해야하는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부터가 큰 난관이며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숙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